오후 3시, 햇살이 하얀 벽면에 직사각형의 그림자를 그릴 때
우리는 그냥 여기 있기로 했다. 굳이 어디론가 더 가야 한다는 여행자의 강박을 기꺼이 버리기로 한 건, Kai Du Guang Chang Jiu Dian의 로비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육지 위에 떠 있는 크루즈라는 설명이 처음에는 조금 과장됐다고 생각했지만, 눈부시게 하얀 외벽과 시야가 탁 트인 구조를 마주하니 그것은 꽤 근사한 비유였다. 체크인을 마치고 곧장 해수 풀로 향하는 길, 9월의 이란 하늘은 누군가 깨끗이 씻어낸 것처럼 투명했다. 공기는 적당히 건조했고, 살갗에 닿는 바람은 끈적임 없이 매끄러운 실크처럼 부드럽게 감겨왔다.
풀장에 몸을 담그자 짭조름한 바다 내음과 옅은 소독약 냄새가 섞여 훅 끼쳐왔다. 물의 온도는 체온보다 아주 조금 낮아서, 처음 발을 들였을 때 가벼운 전율이 일었지만 이내 기분 좋은 서늘함으로 바뀌었다. 물결 너머로 바라본 구이산섬은 푸른 수평선 위에 놓인 작은 점처럼 아득했다. 당신은 내 옆에서 손가락으로 물결을 가르며 나직하게 물었다. "우리가 지금 배를 타고 어디론가 천천히 이동하는 중인 것 같지 않아?" 나는 대답 대신 물속에서 당신의 손등을 살짝 눌렀다. 우리는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지만, 정박한 배 위에서 느끼는 안온함만으로도 충분했다.
물 밖으로 나왔을 때 피부에 남은 소금기는 하얀 결정이 되어 햇빛 아래 보석처럼 반짝였다. 몸을 감싼 수건의 포근한 촉감과 발바닥에 닿는 데크의 미지근한 온기가 마음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나란히 누워 하늘을 봤다. 구름이 아주 천천히, 정말 아주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무언가 대단한 의미나 목적지를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저 물의 촉감과 바람의 온도, 그리고 곁에 있는 사람의 고른 숨소리만으로 공간이 빽빽하게 채워졌다. 60%의 힘만 쓰고 나머지는 온전히 비축하겠다는 내 계획이 이곳에서는 아주 쉽게, 그리고 완벽하게 실현되고 있었다.
밤 11시, 방 안의 조명이 낮은 채도로 고요해지을 때
객실의 문을 닫는 순간, 외부의 모든 소음이 진공 상태처럼 완전히 차단되었다. Kai Du Guang Chang Jiu Dian의 룸은 생각보다 훨씬 넓어, 내 작은 기침 소리가 아주 살짝 울릴 정도의 쾌적한 공간감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시몬스 침대의 바스락거리는 시트 위에 나란히 누워 웰컴 트레이에 놓인 작은 디저트를 나눠 먹었다. 혀끝에 닿는 달콤함이 천천히 퍼졌고, 우리는 그 맛의 정체에 대해 아주 구체적이고 사소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건 약간의 산미가 섞인 바닐라 맛이야." 당신의 정교한 분석에 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세심한 관찰력이 나는 좋았다.
피부에 닿는 면의 감촉은 서늘하면서도 부드러웠고, 몸을 깊게 감싸 안는 매트리스의 탄성은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불을 끄고 창밖을 내다보자, 9월의 밤하늘은 우유를 엎지른 것처럼 희미한 은하수가 흐르고 있었다. 바다 너머에서 밀려오는 파도 소리가 아주 낮은 저음으로 깔렸다. 마치 거대한 배의 내실에 들어와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기분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관계라는 건, 함께 고요함을 견디는 게 아니라 그 고요함 자체를 즐길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당신이 문득 "내일은 그냥 계속 누워 있을까?"라고 물었을 때, 나는 그것이 이번 여행에서 세운 가장 완벽한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무용한 시간의 가치를 아는 사람끼리 만난 것은 인생에서 꽤 괜찮은 행운이다. 우리는 서로의 호흡이 일치하는 리듬을 찾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에어컨의 낮은 기계음이 일정한 박자의 자장가처럼 들렸고, 방 안의 온도는 우리가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최적의 지점에 맞춰져 있었다. 굳이 힘내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냥 여기 이렇게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의 빈 구석이 묵직하게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나쁘지 않은 밤이었다. 아니, 충분히 좋은 밤이었다.
수평선 너머로 달빛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