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여기서 걷자고 했어?"
"야, 진짜 양밍산까지 가야 해? 지금 11월이라고. 바람 불면 진짜 얼어 죽어!" 민석이 외투 깃을 바짝 세우며 툴툴거렸다. 지수가 코웃음을 쳤다. "누가 가자고 했더라? 아까 지도 펴고 호기롭게 걷자고 한 건 너였잖아!" 우리는 서로를 쏘아봤다. 찰나의 정적이 흐르고, 결국 범인은 나였다. "미안... 근데 11월 단풍이 그렇게 예쁘다며." 내 말에 둘은 동시에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말도 안 돼. 이 날씨에 단풍이라니, 그냥 호텔로 돌아가자. 거기 침대가 천국이야."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이번 여행의 유일한 계획이었던 '탐험'은 그렇게 10분 만에 종료됐지만, 우리는 낄낄거리며 웃고 있었다. 멍청한 결정이 주는 묘한 해방감이 차가운 공기를 타고 우리 사이를 메웠다.
도심 속 초록빛 섬에서 누리는 무용한 시간
Han Ju Jiu Dian의 엽올 객실로 돌아오자마자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바닥에 쓰러졌다. 방 안에는 짙은 초록색 가죽 소파가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11월의 오후 햇살이 낮은 각도로 스며들어 가죽의 미세한 결을 하나하나 훑고 지나갔고, 그 빛을 머금은 초록색은 마치 깊은 숲속의 이끼처럼 고요하고 무거웠다. 손끝으로 만져본 가죽은 처음엔 서늘했지만, 이내 우리의 체온을 흡수하며 미지근하게 변해갔다. 벽면을 채운 목재의 나뭇결에서는 은은한 삼나무 향이 배어 나왔고, 과장 없이 곧게 뻗은 선들이 방 전체에 차분한 질서를 부여하고 있었다.
커다란 통창 너머로는 타이베이의 분주한 도시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자동차들이 개미처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두꺼운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둔 이곳은 지독할 정도로 고요했다. 우리는 그 정적 속에 우리의 소란스러운 웃음소리를 던져 넣었다. 빳빳하게 다려진 흰색 침대 시트에 몸을 눕히자, 적당한 탄성이 등을 부드럽게 받쳐주었다. 굳이 무언가를 하려 애쓰지 않아도 충분한 공간이었다. 호텔의 옥상 수영장에서 내려다보던 화려한 시티뷰나 최신 설비를 갖춘 체육관의 활기찬 에너지와는 또 다른, 지극히 개인적이고 안락한 휴식이었다. 무용한 시간들이 방 안을 천천히 채웠고, 누군가는 낮잠을 잤으며 누군가는 창밖의 무심한 풍경을 관찰했다. 특별할 것 없는 오후였지만, 그 평범함이 주는 안도감이 좋았다. 초록색 소파에 기대어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순간, 나는 이번 여행에서 가장 필요했던 것이 바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였음을 깨달았다.
와인 잔에 고인 진심과 미지근한 고백
밤 11시, 방 안의 조명을 낮게 조절하고 비굿 레스토랑에서 포장해온 음식을 펼쳤다. "와, 이 스테이크 육즙 좀 봐. 진짜 미쳤는데?" 지수가 감탄하며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겉은 바삭하게 익어 고소한 향이 났고, 속은 선홍빛의 촉촉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우리는 와인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맑은 금속음이 공기를 갈랐다. "솔직히 말해봐. 아까 양밍산 가기 싫어서 거짓말한 거지?" 민석이 짓궂게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냥 그랬어. 걷는 것보다 여기 누워있는 게 더 여행 같았거든." 지수가 킥킥거렸다. "나도 사실 그랬어. 네가 가자고 해서 그냥 따라간 척한 거야." 우리는 서로의 솔직함에 낄낄거렸다. 화려한 명소나 대단한 체험은 없었지만, 미지근한 와인과 잘 익은 고기, 그리고 적당한 거리의 농담들이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우리는 더 이상 어디로 가야 할지 논하지 않았다. 지금 여기, 이 포근한 방에 머무는 것이 정답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초록색 소파 위에 남겨진 빈 와인 잔 속에 오후의 빛이 마지막까지 고여 있었다.
- 비굿 레스토랑의 스테이크와 함께하는 느긋한 룸서비스 저녁 식사를 추천한다.
- 엽올 객실의 커다란 통창 옆에서 타이베이의 오후 햇살을 가만히 관찰해 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