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제일 늦게 도착할지 내기를 했다. 결과는 뻔했다. 공항에서부터 땀을 비 오듯 흘리던 친구가 짐을 잃어버릴 뻔하며 꼴찌가 됐다. 8월의 타이베이는 공기가 눅눅하다 못해 끈적였다. 한숨을 내쉬며 Han Ju Jiu Dian 로비로 들어섰을 때, 날카로운 에어컨 냉기가 피부에 닿았다. "와, 이제야 살 것 같다."라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비굿 레스토랑에서 파스타를 주문했다. 미국식과 이탈리아식이 묘하게 섞인 조합이었는데, 진한 소스의 풍미가 혀끝에 묵직하게 남았다. 창밖은 여전히 습한 열기로 가득했지만, 하얀 접시 위에 놓인 음식은 정갈하고 차분했다. 우리는 말없이 포크질에 집중했다. 입안 가득 퍼지는 크림의 고소함이 여행의 피로를 씻어내리는 기분이었다.
충전기를 안 가져온 친구를 두고 한참을 놀려댔다. "이게 바로 진정한 미니멀리즘 여행이지."라고 뻔뻔하게 대꾸하는 꼴이 가관이었다. 우리는 Han Ju Jiu Dian의 특가 패키지로 예약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내일 아침 조식 뷔페의 메인 요리를 누구보다 빨리 선점하러 가기로 합의했다.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습도가 77퍼센트라는 뉴스 속보를 듣고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봤다. "이 정도면 그냥 물속에서 걷는 거 아니야?"라는 농담이 튀어나왔다. 우리는 스스로를 '인간 찜기'라고 부르기로 했다. 눅눅한 옷감이 피부에 달라붙는 불쾌함마저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우리만의 유치한 이름 짓기가 여행의 진짜 묘미였다.
엽올 객실의 짙은 초록색 가죽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타이베이 시내는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뒤라 묘하게 투명했다. 젖은 도로 위로 도시의 네온사인이 번지듯 반사됐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풍경을 응시하는 시간. 정적 속에 오직 서로의 숨소리만 들리는 그 찰나가 충분했다.
방 안의 나무 무늬가 마음을 차분하게 고요해지혔다. 바스락거리는 하얀 침대 시트의 촉감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쾌적함이 느껴졌다. 특히 카펫이 없어 발바닥에 닿는 바닥의 매끄러움과 분리된 욕실 구조가 마음에 쏙 들었다. 공간이 넉넉해 친구들의 짐 가방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어도 답답하지 않았다. 그저 누워있기 위해 설계된 완벽한 요새 같았다.
예고 없이 장대비가 쏟아졌다. 촘촘하게 짜놓았던 일정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쾌재를 불렀다. 젖은 신발을 현관에 툭 던져두고 룸서비스를 시켰다. 창문을 때리는 거센 빗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짜릿한 모험이었다.
거창한 의미를 찾으려 애쓰지 않는 여행이 좋다. 그냥 좋았으니까 떠나는 것이고, 좋았으니까 기억하는 것이다. 이곳에서의 며칠은 그렇게 무용하고도 따뜻했다. 층마다 놓인 탄산수 디스펜서에서 컵을 채우며 나누던 시시한 대화들, 그리고 함께였다는 사실. 그 이상은 필요 없었다.
눅눅한 공기 속에 남은 건, 서로의 맑은 웃음소리뿐이었다.
- 비굿 레스토랑의 진한 파스타, 생각보다 꽤 근사하니 꼭 먹어봐.
- 엽올 객실의 초록색 소파에 누워 멍하니 시내 풍경을 감상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