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한구석, 숲을 닮은 작은 안식처
초록색 가죽 의자. 짙은 숲의 심연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깊은 색감. 손끝에 닿는 가죽의 서늘하고 매끄러운 촉감과 코끝을 스치는 묵직하고 고급스러운 가죽 향. 통창으로 쏟아지는 6월의 빛이 의자의 완만한 굴곡을 따라 부드럽게 흐르는 모습.
빗소리에 섞여 든 무용한 대화
"음악 페스티벌, 갈 수 있을까?" 창밖의 회색빛 하늘을 보며 그가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엽올 객실의 초록색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가죽이 내 무게를 받아내며 낮게 찌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될까. 비 그칠 때까지." 내 말에 그는 잠시 망설이다 이내 내 옆으로 다가와 나란히 누웠다. 빗소리가 창문을 때리는 리듬만이 방 안을 채웠고, 계획했던 일정들이 하나둘 지워질수록 마음은 오히려 가벼워졌다.
초록색 의자가 허락한 온전한 멈춤
체크아웃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깨달았다. 우리가 이번 여행에서 가장 오래 머물며 서로의 숨소리에 귀 기울였던 곳은 화려한 관광지가 아니라, Han Ju Jiu Dian 객실의 그 작은 의자와 침대 위였다는 것을. 6월의 타이베이는 잔인할 정도로 습했다. 송강로의 아스팔트는 비가 그친 뒤 뜨거운 김을 내뿜었고, 끈적한 공기는 피부에 달라붙어 숨통을 조였다. 하지만 호텔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그 모든 불쾌함은 정교하게 설계된 서늘함 속으로 씻겨 내려갔다.
엽올 객실의 인테리어는 절제되어 있었지만, 그 속에 담긴 배려는 세심했다. 나무의 결이 살아있는 가구들과 짙은 초록색 가죽의 조화는 마치 도시 한복판에 숨겨진 비밀스러운 숲 같았다. 복도에 마련된 탄산수와 생수 디스펜서에서 컵을 채울 때 들리던 청량한 물소리, 그리고 카펫 하나 없이 매끄럽게 닦인 욕실 바닥의 쾌적함은 이곳이 단순한 숙소가 아니라 완벽한 도피처임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서로에게 무언가를 증명하거나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저 각자의 속도로 숨을 쉬고, 가끔은 시선을 맞추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아침에 방문한 비굿 레스토랑에서의 기억도 선명하다. 접시 위에 놓인 제철 망고의 노란색은 지나치게 선명해서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다.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느껴지는 차가운 온도와 혀끝을 자극하는 강렬한 달콤함, 그리고 끝에 남는 은은한 산미. 그것은 6월의 타이베이가 줄 수 있는 가장 정직한 환대였다. 우리는 말없이 망고를 먹었고, 갓 내린 커피의 온기가 목을 타고 내려가는 감각에 집중했다.
오후에는 도시 전망 수영장에 올랐다. 푸른 물결 위로 타이베이의 회색 건물들이 겹쳐 보였다. 물속에 몸을 담그자 피부를 조이던 습기가 사라지고 기분 좋은 부력이 찾아왔다. 수영장 끝에 기대어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바라보며, 우리는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잠시 잊어버렸다. 이렇게 무용한 시간이 겹겹이 쌓여갈수록 우리의 관계는 오히려 단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거창한 약속이나 뜨거운 고백은 없었다. 다만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내며 서로를 보고 살짝 웃었을 뿐이다.
결국 여행이란 낯선 곳에서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편안하고 무방비한 상태의 나를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Han Ju Jiu Dian의 그 초록색 의자는 우리에게 그럴 수 있는 허락을 해주었다. 억지로 힘내어 걷지 않아도 되는 곳, 그냥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하며 게으르게 누워 있을 수 있는 곳. 그 무용함이 주는 안락함이 이번 여행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그곳에 간다면, 나는 여전히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않을 것이다. 그저 그 초록색 가죽의 서늘함 속에 다시 한번 몸을 맡기고 싶을 뿐이다.
빗방울이 맺힌 유리창 너머로 도시의 불빛이 번지고 있었다.
- 비굿 레스토랑에서 제철 망고를 곁들인 조식을 천천히 즐겨보길 권한다.
- 도시 전망 수영장에서 해 질 녘의 타이베이 스카이라인을 가만히 바라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