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댑터 하나에 무너진 완벽한 계획
"야, 진짜 안 가져왔어?" 민수가 내 캐리어를 툭 치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챙긴다며!" 내가 억울함에 목소리를 높이자, 옆에서 지훈이가 배를 잡고 낄낄거렸다. "단톡방 다시 확인해 봐. 너 분명히 '알겠어'라고 답장했잖아." 셋이서 서로를 멍하니 쳐다봤다. 결과는 전원 미소지. "와, 우리 진짜 환상의 팀이다. 이 정도면 예술인데?" 누군가의 비아냥에 결국 다 같이 폭소를 터뜨렸다. Fu Rong Da Fan Dian 로비의 서늘한 에어컨 바람과 은은하게 감도는 고급스러운 디퓨저 향이 우리의 멍청한 침묵을 기분 좋게 메웠다.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캐리어 바퀴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고, 우리는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이번 여행의 유일한 계획인 것처럼 낄낄거리며 체크인을 마쳤다.
소음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방의 온도
방에 들어서자마자 무거운 가방을 바닥에 던져두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빳빳하게 다려진 흰 시트의 바스락거리는 촉감이 피부에 닿았고, 10월 타이베이의 건조하고 쾌적한 공기가 방 안을 포근하게 감쌌다. 창문을 살짝 열자 대안삼림공원에서 밀려온 옅은 풀내음과 젖은 흙 내음이 섞여 들어왔다. 도심 한복판임에도 소음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오직 내 가벼운 숨소리와 벽시계의 규칙적인 초침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현대적인 감각의 인테리어와 눈을 편안하게 만드는 은은한 간접 조명은 낮 동안의 소란을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특히 이곳의 옥상 수영장에서 내려다보았을 법한 탁 트인 개방감이 방 안의 정적과 묘하게 어우러져, 마치 도시라는 거대한 숲속의 작은 은신처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얇은 가디건을 걸치고 창밖을 보니, 하늘은 누군가 짙은 파란색 물감을 쏟아부은 듯 비현실적으로 선명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사라지고, 그저 누워 있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목적을 달성한 기분이 들었다. 카펫 위에 가늘게 그어진 햇살의 선을 멍하니 바라보며, 우리는 비로소 함께 있다는 안도감 속에 깊이 고요히 머무했다. 로비에서 느꼈던 친절한 미소와 엘리베이터의 낮은 진동음이 잔상처럼 남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속도가 느려진 것만 같았다. Fu Rong Da Fan Dian의 정갈한 공간은 우리 사이의 서먹함을 지우고 오직 휴식이라는 본질만 남겨주었다.
식어버린 찻잔 속에 고인 진심
"사실 이번 여행, 오기 싫었어." 지훈이 낮게 읊조렸다. "왜?" "그냥, 다 귀찮았거든. 일상에 치여서 그런지 어디 멀리 가는 것 자체가 숙제처럼 느껴졌어." 나는 식어가는 찻잔의 온기를 손끝으로 느끼며 천천히 답했다. "나도 그랬어. 공항 가는 길까지는 계속 후회했지." "근데 막상 여기 오니까... 나쁘지 않네." "응, 수박 진짜 달더라." 우리는 아까 순원에서 맛본 전복의 쫄깃한 식감과 문화로 푹 고아낸 마늘닭탕의 알싸하고 진한 향을 떠올렸다. 특히 마지막에 나온 수박의 청량한 단맛은 이번 여행의 모든 피로를 씻어내 주는 듯했다. 화려한 위로나 거창한 약속 같은 건 필요 없었다. 그저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의 낮은 숨소리를 확인하고, 함께 침묵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밤이었다.
투명한 파란 하늘 아래,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었다.
- Fu Rong Da Fan Dian 근처 대안삼림공원에서 정처 없이 걷기.
- 순원에서 전복과 마늘닭탕이 포함된 세트 메뉴 즐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