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다섯 가지의 조각들
길치들의 허망한 내기. 이번 여행의 시작은 누가 먼저 길을 잃을지 내기를 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결과는 허무했다. 행천궁역 4번 출구로 나와 눅눅한 도시의 공기를 가르며 횡단보도를 건너고, 고소한 원두 향이 풍기는 루이사 커피를 지나 조금만 걷자 Lv Ju Wen Lv Tai Bei Song Shan Ji Chang Guan 건물이 거짓말처럼 나타났다. "이렇게 찾기 쉬울 리가 없는데"라며 서로를 바라보던 우리는 결국 동시에 헛웃음을 터뜨렸고, 내기는 시작되기도 전에 허망하게 끝이 났다.
낯선 도시가 건넨 다정한 온기. 객실의 문을 열자마자 우리를 맞이한 것은 서늘하면서도 쾌적한 공기였다. 담배 냄새나 눅눅한 먼지 대신 정돈된 정적만이 흐르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정작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화장실의 변기 시트였다. 엉덩이가 닿는 순간 전해지는 미지근한 온기. 대단한 환대는 아니었지만, 낯선 타지에서 만난 그 작은 온도가 마치 "고생했어"라고 말해주는 다정한 위로처럼 느껴져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우리는 이케아 컵에 담긴 시원한 물을 마시며 한동안 그 사소한 온도에 대해 속삭였다.
장미 향기와 제트 엔진의 불협화음. 신생공원 장미원에 들어섰을 때, 세상은 온통 붉은 꽃잎의 물결이었다. 진한 장미 향기에 취해 벤치에 앉아 있던 찰나, 머리 위로 거대한 굉음이 쏟아져 내렸다. 송산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가 낮게 날아가는 소리였다. 낭만적인 장미 넝쿨과 귀를 찢는 제트 엔진의 소음.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오히려 이 도시의 역동적인 리듬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귀를 막으면서도, 하늘을 가르는 은빛 날개를 보며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8층 라운지, 약간 탄 토스트의 미학.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8층 라운지에서는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셀프바의 토스터기에서 툭 튀어 오른 식빵 하나가 모서리 부분이 약간 검게 탔다. 하지만 코끝을 자극하는 그 고소하고 쌉싸름한 탄내가 오히려 식욕을 돋웠다. 전기포트로 끓인 뜨거운 물에 커피를 타고, 바삭한 토스트를 씹으며 창밖의 회색빛 도시를 응시했다. 특별한 대화는 없었지만, 함께 씹고 마시는 행위만으로도 충분히 충만해지는 시간이었다.
무용(無用)한 산책이 주는 해방감. 10월의 타이베이는 25도의 온도로 우리를 반겼다. 얇은 외투 한 벌을 걸치고 걷기에 더없이 완벽한 온도였다. 보정 없이도 시리게 파란 하늘과 건조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땀 한 방울 나지 않는 산책은 생각보다 훨씬 달콤했다. 신생공원의 미로 정원을 정처 없이 헤매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무언가 대단한 목적지를 찾으러 간 게 아니라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걸었을 뿐인데, 그 무용함이 주는 편안함이 우리를 깊은 휴식으로 이끌었다. Lv Ju Wen Lv Tai Bei Song Shan Ji Chang Guan에서의 휴식은 그렇게 완성되어 갔다.
이 모든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풍경이 될 때
여행은 거창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떠나는 고행이 아니다. 그저 평소와 다른 좌표 위에서, 익숙한 사람과 함께 평소에는 하지 않았을 엉뚱한 짓을 해보는 것뿐이다. 길을 잃지 않아 허탈했던 내기, 살결에 닿았던 변기 시트의 온기, 장미원 위를 가로지르던 비행기의 굉음, 그리고 입안에서 바스락거리던 약간 탄 토스트의 맛. 이런 사소하고 파편적인 디테일들이 겹겹이 쌓여 비로소 하나의 기억이라는 풍경이 된다. 우리는 서로의 서툰 모습을 놀리며 낄낄거렸고, 그 소란스러운 웃음소리 속에 섞여 잠시 무거운 일상을 잊을 수 있었다.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저 그 공간에, 그 온도 속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번 여행은 충분히 성공적이었다.
창가에 기대어 보니 도시의 불빛이 보석처럼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 행천궁역 4번 출구에서 호텔까지 천천히 걸으며 주변 카페의 진한 커피 향을 맡아보길 권한다.
- 8층 라운지에서 토스트를 구울 때, 일부러 조금 더 바삭하게 구워 쌉싸름한 커피와 곁들여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