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다섯 가지의 틈새
셔틀버스 안의 묘한 정적과 갑작스러운 웃음. 낡은 가죽 시트의 쿰쿰한 냄새와 에어컨의 덜덜거리는 소음이 가득한 셔틀버스 안, 우리는 누구 하나 늦지 않을 거라며 유치한 내기를 했다. 하지만 정작 늦은 건 가오슝 시내로 향하는 버스였고, 좁은 좌석에 끼어 서로의 멍한 표정을 구경하던 찰나 기사가 급커브를 틀며 모두가 한쪽으로 쏠렸다. "와, 진짜 다 같이 쏠리네!"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터져 나온 웃음은 좁은 차 안을 순식간에 온기로 채웠고, 낯선 이들과의 경계심마저 허물어뜨렸다.
발소리를 집어삼키는 두툼한 카펫의 환대. 더 그랜드 호텔 가오슝의 객실 문을 열자마자 나를 맞이한 건 발등까지 푹신하게 감싸 안는 짙은 와인빛 카펫이었다. 신발을 벗고 그 위에 그대로 누우니, 서늘한 에어컨 바람과 정교한 천장 몰딩이 주는 압도적인 고요함이 온몸을 감싸 안았다. 옆에서 친구가 깊은 잠에 빠져 코를 골기 시작했지만, 그 소리마저 카펫의 촘촘한 결 사이로 스며들어 아득한 배경음처럼 들리는 기분이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소음으로부터 격리된 비밀스러운 요새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야심을 무너뜨린 광활한 수영장의 나른함. 올림픽 규격이라는 웅장한 규모에 압도되어 우리는 수영 대결을 펼치기로 야심 차게 계획했다. 하지만 9월의 가오슝 햇살이 정수리를 뜨겁게 달구는 순간, 차가운 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자 모든 경쟁심은 하얀 수증기처럼 증발해 버렸다. 눈을 감으면 물결을 따라 부서지는 햇살의 파편들이 눈꺼풀 너머로 아른거렸고, 우리는 결국 한 바퀴도 돌지 않은 채 물 위에 둥둥 떠서 조각난 구름만 바라보며 "그냥 이렇게 있자"라고 속삭였다. 운동하러 왔다가 게으름의 미학을 배우고 간 셈이었다.
시간을 되감는 정갈한 중식의 온기. 호텔 레스토랑에서 마주한 요리들은 마치 잘 짜인 한 폭의 동양화처럼 단정하고 우아했다.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은은한 자스민 향과 얇은 본차이나 접시가 부딪히는 맑은 소리, 그리고 한 입 베어 문 음식은 화려한 수식어보다는 투박하고 깊은 '옛날의 맛'을 품고 있었다. "어디서 먹어본 맛인데, 정말 그리운 맛이야."라는 친구의 말에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대화를 멈추고, 혀끝에 닿는 따스한 온기와 식재료 본연의 풍미에만 온전히 집중했다.
칭징호의 노을이 머무는 반야외 복도. 비스트로의 긴 복도 끝에 앉아 칭징호의 잔잔한 수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습기를 머금은 9월의 바람이 뺨을 부드럽게 스쳤고, 하늘은 서서히 타오르는 오렌지색과 보랏빛으로 물들어 호수 위로 쏟아져 내렸다. 누군가 '예쁘다'고 말하려다 입술을 뗐지만, 이내 침묵을 선택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속에 같은 풍경이 그려지고 있다는 안도감이 밀려왔고, 그 적막함은 그 어떤 대화보다 더 깊은 위로가 되어 우리 사이를 채웠다.
흩어진 조각들이 모여 완성된 휴식
여행의 목적이 꼭 거창할 필요는 없다. 그저 낯선 곳에서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이 눕고, 조금 더 천천히 음미하는 것. 더 그랜드 호텔 가오슝에서의 시간은 그런 무용한 순간들의 집합이었다. 두꺼운 커튼 뒤로 숨어 세상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친구들과 투덜거리며 보낸 나른한 오후들. 그 사소한 틈새들이 모여 이번 여행을 잊지 못할 다정한 기억으로 엮어냈다.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반쯤 남은 미지근한 물 한 잔.
- 해 질 녘, 칭징호가 내려다보이는 비스트로 복도에서 침묵의 시간 갖기.
- 호텔 내 골프 연습장에서 가볍게 스윙하며 가오슝의 바람 느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