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을 풀기도 전에 내기를 했다. 누가 먼저 이 끝도 없이 이어진 복도에서 길을 잃을 것인가. 발소리가 공허하게 울리는 복도는 마치 거대한 미로 같았고, 은은한 나무 향이 코끝을 스쳤다. 20분 뒤, 우리 셋은 약속이라도 한 듯 로비 정중앙에서 다시 만났다. 서로의 멍한 얼굴을 보고 터져 나온 웃음. 시작부터 엉망이었지만, 그 무질서함이 오히려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 같았다.
더 그랜드 호텔 가오슝의 중식 요리는 정직하고 깊었다. 찻잔에서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하얀 김이 콧등을 간지럽혔고, 입안에 닿는 음식들은 화려한 수식어보다 재료 본연의 단맛과 짭조름함이 먼저 느껴졌다. 젓가락 끝에 걸리는 식재료의 탱글한 질감이 살아있었다. 몇 번의 식사만으로 허기가 사라졌고, 마음속까지 따뜻한 온기가 차올랐다.
"야, 우리 여기서 보니까 진짜 성에 잘못 들어온 평민들 같지 않냐." 친구의 툭 던진 말에 모두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웅장한 궁전 양식의 건축물과 금빛 장식들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작아졌지만, 그 괴리감이 오히려 해방감을 주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가장 격식 없는 자세로 벨벳 소파에 널브러져 낄낄거렸다.
치파오를 빌려 입고 사진을 찍기로 했다. 한 친구는 옷이 너무 커서 어깨가 자꾸 흘러내렸고, 다른 친구는 숨을 참느라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빨개졌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복도를 가득 채운 웃음소리가 실크 옷감의 바스락거림과 섞였다.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 어설픈 몸짓들이 우리만의 비밀스러운 암호처럼 느껴졌다.
창밖으로 펼쳐진 고요한 호수 풍경을 가만히 응시했다. 1월의 가오슝 햇살은 얇은 커튼을 통과해 피부 위로 너그럽게 내려앉았다. 반소매 차림으로 창가에 기대어 있으면, 시간이 꿀처럼 아주 천천히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냥 누워있는 것, 그것이 이번 여행의 유일하고도 완벽한 목적이었다.
올림픽 규격의 수영장은 생각보다 더 광활했다. 25미터와 50미터 사이를 오가며 차가운 물살을 가를 때, 피부에 닿는 물의 압력이 정신을 맑게 깨웠다. 사우나 냉탕에 몸을 던졌을 때의 그 짜릿한 전율. 뜨거운 탕과 차가운 탕을 오가며 몸의 긴장을 눅눅하게 풀어내자, 비로소 공간의 쾌적함이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사랑의 강 근처로 나갔을 때, 15미터 높이의 울트라맨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강바람이 뺨을 스치는 가운데, 우리는 그 거대한 조형물을 앞에 두고 5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바라보는 것. 그 무용한 시간이 이번 여행에서 가장 밀도 높게 기억될 순간이었다.
특별한 사건은 없었다. 계획했던 일정의 절반도 채우지 못했다. 하지만 젖은 머리카락이 베개에 닿는 서늘한 감촉을 느끼며 천장을 바라보았을 때, 이번 여행은 꽤 성공적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대단한 의미를 찾으려 애쓰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충만함이었다. 더 그랜드 호텔 가오슝의 포근한 품속에서 다시금 이곳을 꿈꾸게 될 것 같다.
햇볕에 바싹 말린 수건에서 포근한 냄새가 났다.
- 호텔 중식당에서 정갈한 코스 요리 꼭 먹어봐.
- 사랑의 강 울트라맨이랑 사진 찍고 멍 때리기 추천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