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댑터 세 개가 증발한 기적의 시작
"야, 진짜로 어댑터 안 가져온 거야? 너 설마 짐 쌀 때 유튜브 보고 있었냐?"
"내 기억으론 분명히 파란색 파우치에 넣었다고! 진짜라니까!"
"그 파우치 지금 네 가방에 없잖아, 이 멍청아. 누가 제일 먼저 사고 칠지 내기를 했어야 했는데."
"이미 졌네. 셋 다 안 가져왔으니까. 하하하!"
서로의 얼굴을 보며 동시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랜드 하얏트 타이베이 로비의 거대한 천장은 우리의 바보 같은 웃음소리를 웅웅거리며 증폭시켰고, 공기 중에는 고급스러운 디퓨저 향과 여행객들의 설렘이 뒤섞여 있었다. 4월의 타이베이는 피부에 닿는 공기부터 눅눅하고 부드러웠다. 우리는 이번 여행이 '미지의 탐험'인지 아니면 '완벽한 방치'인지 치열하게 토론했고, 결국 후자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한 계획을 세우는 것만큼 피곤하고도 짜릿한 일은 없으니까.
발목을 잡는 정적과 푹신한 안식
방 문을 열자마자 느껴진 것은 정적과 함께 밀려오는 서늘한 냉기였다. 1990년에 문을 열었다는 이 호텔의 세월은 공간의 구석구석에 묵직하게 스며 있었다. 최신식 호텔의 날카로운 세련미보다는, 오래도록 잘 길들여진 가죽 소파 같은 편안함이 우리를 맞이했다. 발걸음을 완전히 집어삼키는 두툼한 카펫의 촉감은 마치 깊은 숲속의 이끼 위를 걷는 기분이었고, 내가 기침을 하면 그 소리가 방의 네 모퉁이를 한 바퀴 돌아 다시 내 귀로 돌아올 것 같은 광활한 넓이였다.
침대에 몸을 던지자 차가우면서도 매끄러운 하얀 시트가 온몸을 감쌌다. 4월의 타이베이 햇살이 암막 커튼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바닥에 가느다란 금색 선을 그어놓았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빛의 선 위에 발가락을 맞대고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창밖으로는 타이베이 101 빌딩의 끝부분이 보였다. 저 거대한 건축물 아래에서 우리는 아주 작은 점이 되어 나른한 평화를 만끽했다.
욕실의 매끄러운 대리석 타일은 발바닥에 닿았을 때 적당히 차가웠고, 비누에서는 옅은 자스민 꽃향기가 났다. 그랜드 하얏트 타이베이 가 자랑하는 8개의 레스토랑과 야외 수영장이 우리를 유혹했지만, 굳이 밖으로 나갈 이유를 찾지 못했다. 신발을 신고 걷는 것보다, 이 푹신한 고립 속에서 서로의 무능함을 확인하는 것이 훨씬 생산적으로 느껴졌다. 우리는 그렇게 한 시간 동안 아무 말 없이 천장의 무늬를 세었다. 4월의 습도가 피부에 닿는 느낌은 젖은 수건처럼 무거웠지만, 동시에 포근하게 우리를 짓눌렀다.
눅눅한 밤, 낮게 흐르는 진심
"양명산에서 나비 한 마리도 못 본 거, 이거 우리 여행의 흑역사로 기록해야 하는 거 아냐?"
"원래 기대가 없어야 실망도 없는 법이야. 나비 대신 안개를 봤으니 됐지."
"근데 아까 먹은 우육면은 진짜였다. 국물이 너무 진해서 혀끝이 얼얼할 정도였어."
"난 그냥 그 가게 주인아저씨의 무심한 표정이 좋더라. 마치 우리가 여기 온 게 당연하다는 듯한 그 표정."
"너는 진짜 특이해. 그게 좋냐?"
밤이 깊어지자 방 안의 조명은 낮게 고요해져 오렌지빛 온기를 띠었다. 우리는 룸서비스로 시킨 안주를 가운데 두고 둥글게 모여 앉았다. 낮의 소란스러웠던 농담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목소리에는 눅눅한 밤의 물기가 섞였다.
"우리 다음에도 이렇게 오자. 아무 계획 없이, 어댑터도 다 잊어버린 채로."
"글쎄, 그럴 리 없겠지만 이번엔 내가 챙길게. 너희 믿고 맡기면 지구 끝까지 어댑터 없이 갈 것 같아."
우리는 서로의 등을 맞대고 누워 낮게 웅얼거렸다. 거창한 약속 같은 건 필요 없었다. 그냥 지금 이 순간, 눅눅한 공기 속에서 함께 멍청해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룸서비스로 온 차가운 물컵 표면에 맺힌 이슬이 손가락 끝을 적셨을 때, 그 작은 차가움이 오히려 정신을 맑게 깨웠고, 우리는 새벽 세 시까지 의미 없는 말들을 보석처럼 주고받았다.
탁자 위 물컵에 맺힌 이슬이 천천히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 101 빌딩 주변의 골목을 정처 없이 걷다가 이름 모를 작은 찻집에 들어가기.
- 호텔 조식 뷔페에서 가장 생소하게 생긴 음식을 골라 서로에게 먹여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