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 햇살이 나무 문틀에 직사각형의 자국을 남길 때
충효신생역 1번 출구로 발을 내디뎠을 때, 10월의 타이베이는 적당히 건조하고 쾌적한 공기로 우리를 맞이했다. 얇은 겉옷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온도, 피부에 닿는 바람이 기분 좋게 서늘했다. 역에서 나와 불과 1분 정도 걸었을까, 도심의 소란함 속에 검은 거울처럼 매끄럽게 빛나는 호텔 그레이스리 타이베이의 외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리의 소음이 발끝에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던 찰나, 호텔 로비를 지나 객실의 문을 여는 순간 그 모든 소란이 거짓말처럼 차단되었다. 마치 도시라는 거대한 소음의 파도를 걸러내는 정교한 필터를 통과한 기분이었다.
방 안은 정갈한 흰색과 따뜻한 나무색의 조화뿐이었다. 일본식 미닫이문이 달린 현관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은은한 편백나무 향과 갓 세탁한 린넨의 깨끗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손끝에 닿는 나무 문틀의 감촉은 매끄럽고 단단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했지만, 그 정적이 어색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정돈된 공간이 주는 안도감이 우리 사이의 빈틈을 적당한 온도로 메워주고 있었다. 화려한 장식 하나 없었지만, 꼭 필요한 것들이 제자리에 놓인 여백의 미가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굳이 무언가를 증명하거나 설명하려 애쓸 필요가 없겠구나.' 침대에 걸터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창밖의 도시는 여전히 바쁘게 흘러갔지만, 이곳의 공기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오후 11시, 욕조에 물이 차오르는 소리가 방을 채울 때
이곳의 모든 객실에는 욕조가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쏴아 하는 물소리가 욕실의 매끄러운 타일 벽에 부딪혀 리드미컬하게 울려 퍼졌다. 뜨거운 물이 차오르며 하얀 김이 서서히 피어올랐고, 욕실 거울은 어느새 뿌연 안개 속에 잠겼다. 특히 욕실과 화장실이 분리된 일본식 구조 덕분에 공간의 쾌적함이 더해졌다. 피부에 닿는 물의 온도는 정확했다. 너무 뜨겁지도, 그렇다고 미지근하지도 않은, 딱 우리가 원했던 그만큼의 온도. "딱 좋다"라고 나직하게 읊조리며 우리는 나란히 몸을 담갔다.
욕조 안의 우리는 타이베이의 화려한 밤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작은 섬 같았다. 고립이라는 단어가 주는 쓸쓸함보다는, 오직 우리만이 공유하는 온기라는 안락함이 훨씬 컸다. 물 밖으로 나왔을 때 피부 위로 느껴지는 서늘한 공기가 오히려 상쾌하게 다가왔고, 보송보송하게 마른 수건의 포근한 감촉이 온몸을 감쌌다. 함께 침대에 누우니 하얀 시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내일 아침엔 근처 푸항 또우장에 가서 긴 줄을 서볼까, 아니면 화산 일구일사 창의문화원구를 천천히 거닐어볼까. 그런 사소하고 다정한 계획들을 나누다 보니 어느덧 깊은 잠이 쏟아졌다. 호텔 그레이스리 타이베이이라고 하면 외벽의 거대한 고질라처럼 무언가 강렬한 인상을 기대하게 되지만, 정작 우리가 발견한 것은 아주 작고 평범한 평화였다. 거창한 약속이나 뜨거운 고백은 없었지만, 서로의 고른 숨소리가 들리는 거리에서 누워있는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의 목적은 이미 달성된 것 같았다.
창밖의 도시 불빛이 조금씩 흐릿해지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