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바퀴를 굴리는 파란색 프레임
대여용 자전거. 손끝에 닿는 서늘한 금속의 감촉과 오래된 안장에서 배어 나오는 눅눅한 가죽 냄새. 페달을 밟을 때마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체인의 마찰음은 마치 여행의 박자를 맞추는 메트로놈 같다. 호텔 외벽의 푸른색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프레임은, 길가에 세워두면 금세 풍경의 일부가 되어 사라져 버리는 그런 물건이다.
목적지 없는 대화의 온도
"어디까지 가보고 싶어?" 내가 묻자, 그는 한참 동안 수평선의 끝을 응시하다가 나지막이 답했다. "그냥, 저기까지." 그 '저기'가 정확히 어디인지 묻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약속이라도 한 듯 페달을 밟았다. 3월의 화롄, 뺨을 스치는 바람은 춥지도 덥지도 않은, 딱 그 정도의 다정한 온도였다. "속도 좀 줄여봐, 너무 빨라." "싫은데, 더 빨리 가고 싶어."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거리를 벌렸다가 다시 좁히기를 반복했다. 별것 아닌 농담들이 투명한 공중으로 흩어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이 터졌고, 목적지가 없다는 사실이 주는 해방감이 우리 사이의 빈틈을 메웠다.
무용한 시간들이 빚어낸 푸른 기억
Qi Xing Tan Du Jia Fan Dian의 공간은 온통 순백의 벽과 짙은 파란색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중해의 어느 작은 마을을 통째로 옮겨놓은 듯한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 우리는 억지로 무언가를 찾아내려 애쓰지 않아도 되었다. 우리가 묵었던 허니문 해경 더블룸의 발코니에 서면, 침대 끝자락에 태평양의 수평선이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천장의 하얀색과 창밖의 파란색이 만나는 경계선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속의 소음이 잦아들었다. 이곳에서는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고여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호텔에서 다섯 걸음만 더 내디디면 곧장 바다에 닿는다. 이곳의 해변은 고운 모래 대신 둥글게 마모된 자갈들이 촘촘히 깔려 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자갈들이 서로 부딪히며 내는 둔탁하고도 청량한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3월의 바다는 회청색에서 서서히 에메랄드빛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고,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갈 때마다 자갈들이 굴러가며 내는 리듬은 거대한 자연이 연주하는 자장가 같았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일상의 강박들이 파도에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밤이 깊어지면 호텔의 24시간 스낵바는 우리만의 작은 은신처가 되었다. 갓 내린 커피의 쌉싸름한 향과 작은 과자 몇 조각. 거창한 만찬은 아니었지만, 정적만이 흐르는 로비에 앉아 창밖의 짙은 어둠을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밤바다의 파도 소리가 로비의 고요함과 섞여 들 때, 우리는 서로의 숨소리에 집중하며 아주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내일은 무엇을 먹을지, 혹은 내일도 그냥 하루 종일 누워 있을지에 대하여. 그 사소한 고민들이 우리를 더 가깝게 만들었다.
다음 날 아침, 뷔페 식당에서 마주한 따뜻한 죽과 신선한 과일들은 정갈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입안에 퍼지는 소박한 온기는 다시 자전거를 탈 힘을 주었다. 호텔 정문의 종탑과 분수대는 사진을 찍으려는 여행객들로 붐볐지만, 우리는 그 소란스러운 흐름을 피해 다시금 바다를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우리는 이번 여행 내내 어떤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왜 이곳에 왔는지,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고민하는 대신, 그저 자전거를 탔고, 자갈 소리를 들었으며, 하얀 벽에 기대어 서로를 바라보았다.
3월의 화롄은 적당히 미지근했고, 우리의 거리 또한 적당히 가까웠다. 무용한 시간들이 겹겹이 쌓여 결국 가장 선명한 기억의 조각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이곳 Qi Xing Tan Du Jia Fan Dian에 돌아온다면, 우리는 아마 또 아무런 계획 없이 누워만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이번 여행의 가장 완벽한 목적이었으니까.
자갈 해변 위에 나란히 기대어 잠든 두 대의 파란 자전거.
- 룸서비스보다 24시간 스낵바의 커피와 함께 밤바다의 정적을 즐길 것.
- 자전거를 빌려 해변의 자갈들이 내는 리듬감 있는 소리에 귀 기울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