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이 빚어낸 다정한 거리감
방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맞이한 것은 차분한 베이지색 벽지와 낮게 내려앉은 천장이 주는 안온함이었다. 화려한 장식 하나 없었지만, 오히려 그 비어있음이 마음을 놓이게 했다. 침대 끝에서 창가까지는 서너 걸음, 그 짧은 거리 속에 우리의 세계가 있었다.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고 있으면 욕실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물소리가 리듬감 있게 공간을 채웠다. '이 정도면 충분해.' 나는 생각했다. 상대가 어디에 있는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적당한 거리의 안도감이었다. 발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감기는 카펫의 포근한 촉감과 12월 화롄의 건조한 공기가 섞여 묘한 쾌적함을 만들어냈다. 창문을 살짝 열자 서늘한 바람이 밀려와 방 안의 온기를 기분 좋게 흔들었고, 빳빳하게 잘 말려진 시트의 서늘한 감촉이 피부에 닿는 순간 비로소 여행의 긴장이 풀렸다. 과하지 않은 정갈함, 그것이 이 방이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다정한 위로였다.
말하지 않아도 닿는 온도의 대화
우리는 Li Xuan Guo Ji Fan Dian의 스파 구역으로 향했다. 따뜻한 물속으로 몸을 천천히 밀어 넣자, 굳어 있던 어깨 근육이 마치 봄눈 녹듯 서서히 풀려나갔다. 수증기가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공간 속에서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끔 눈이 마주치면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굳이 '좋다'고 말하지 않아도, 피부로 느껴지는 물의 온도가 이미 모든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샤워실의 강한 수압이 등줄기를 때릴 때 느껴지는 쾌감과 코끝을 스치는 보송보송한 수건의 향기는 마음속 찌꺼기까지 깨끗이 씻어내 주는 듯했다. 문득 아침 식사 때 맛보았던 따뜻한 죽의 눅눅한 온기와 짭조름하게 볶아낸 채소 요리의 풍미가 떠올랐다. 정성스럽게 준비된 채식 메뉴들의 정갈한 맛은 여행자의 지친 몸을 세심하게 보듬어주는 기분이었다. 서로의 젖은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우리는 동시에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어떤 설명보다 명확한, 우리만의 고요한 동의였다. 물기는 금방 말랐지만, 그 온기는 꽤 오래 피부 밑에 머물며 마음을 데웠다.
각자의 고요가 머무는 10층의 하늘
10층에 위치한 공중정원으로 올라갔다. 12월의 바람은 생각보다 매서워 외투 깃을 바짝 세워야 했다. 우리는 나란히 섰지만, 시선은 서로 다른 곳을 향했다. 한 사람은 멀리 겹겹이 쌓인 산의 능선을, 다른 한 사람은 발아래로 점점이 흩어진 화롄 시내의 불빛들을 응시했다. 함께 있지만 각자의 고요 속에 머무는 시간. 난간의 차가운 금속 촉감이 손끝에 닿았고,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 소리가 바람에 섞여 아스라이 사라졌다. 침묵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가벼운 솜이불처럼 우리 사이를 포근하게 덮어주었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가장 편안한 순간은, 역설적으로 혼자 있을 때와 같은 기분을 느낄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억지로 대화를 채우려 애쓰지 않아도 충분한, 완벽한 거리감이었다. 다시 방으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리는 서로의 어깨에 살짝 기댔다. 그 짧은 접촉만으로도 충분했다. 억지로 힘내지 않아도 되는, 그냥 그대로도 괜찮은 그런 상태.
찻잔 속에 남은 온기가 손바닥에 기분 좋게 머물렀다.
- 호텔에서 무료 자전거를 빌려 해안 도로의 바람을 가르며 달려보길 권한다.
- 저녁에는 동대문 야시장의 소란함 속에서 현지 간식을 하나씩 나눠 먹어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