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카드키의 모서리가 아주 미세하게 닳아 있었다. 우리는 그 작은 마모의 흔적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슬롯에 카드를 밀어 넣었다. 육중한 문이 열리는 순간, 5월 창화의 눅눅하고 무거운 공기가 밀려나고 그 자리를 쾌적하고 서늘한 냉기가 채웠다. 피부에 닿는 공기의 온도가 바뀌는 찰나, 비로소 우리가 구이안 프리펙처 인에 도착했음이 실감 났다. 이곳은 설계자가 공기와 빛의 흐름을 치밀하게 계산한 '숨 쉬는 공간'이라고 했다. 창가에서 침대까지 길게 뻗은 거리만큼, 우리 사이에도 적당하고 다정한 여백이 생겨났다.
방은 생각보다 훨씬 넓고 깊었다. 여섯 명의 디자이너가 각기 다른 테마를 입혔다는 객실 중 우리가 머문 곳은 빛이 낮게 깔리는 정적인 공간이었다. 벽면을 따라 배치된 초록빛 식물들이 내뿜는 은은한 풀 내음이 마음을 차분하게 고요해지혔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푹신한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대통령급 객실이라는 명성답게, 매트리스는 몸의 곡선을 정직하고 부드럽게 받아냈다. 너무 깊지도, 그렇다고 딱딱하지도 않은 그 절묘한 탄성 위에서 나는 '이제야 정말 쉬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잠시 후 방문한 브이아이피 라운지에는 세계 각국의 희귀 지폐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가치라는 이름으로 묶인 무용한 종이 조각들이 나란히 걸려 있는 풍경이 묘하게 비현실적이었다. 우리는 그 지폐들을 하나하나 손끝으로 짚어보며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눴다. 특별한 목적도, 결론도 없는 대화였다. 그저 그곳에 우리가 있었고, 낯선 나라의 지폐가 있었으며, 적당한 온도의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오후였다. 창밖으로는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듯한 무거운 구름이 낮게 내려앉아 있었지만, 방 안의 공기는 더없이 투명했다. 우리는 서로의 호흡이 겹치지 않을 만큼의 거리에서 가만히 누워, 밀려오는 정적을 즐겼다.
새벽 2시, 창밖의 빗소리가 리듬을 만들 때
결국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유리창을 규칙적으로 때리는 빗소리가 마치 낮은 저음의 메트로놈처럼 방 안을 채웠다. 우리는 홀린 듯 욕실로 향했다. 웬만한 방 하나보다 더 넓은 욕실의 중심에는 구이안 프리펙처 인의 자랑인 커다란 마사지 욕조가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수도꼭지를 틀자 솨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뜨거운 물이 차올랐고, 작은 기포들이 수면 위로 몽글몽글 솟아올랐다. 피부에 닿는 물의 감촉은 마치 매끄러운 비단 한 겹을 온몸에 두른 것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
강력한 마사지 제트 분사구가 뭉쳐 있던 등 근육을 정확하고 묵직하게 눌러주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는 대신, 나란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물의 온도는 뜨겁지도 미지근하지도 않은, 딱 몸의 긴장을 풀어줄 만큼의 적당한 온도였다. 그 온기 덕분에 우리는 굳이 말을 섞지 않아도 서로의 상태를 느낄 수 있었다. 침묵은 어색함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가장 깊은 이해의 표현이었다. 고요함이 우리를 더 밀접하게 연결하고 있었다.
문득 낮에 맛보았던 부이팡의 에그요크 페이스트리가 생각났다. 갓 구워낸 빵의 고소한 풍미와 노른자의 묵직한 달콤함이 혀끝에 다시금 감도는 듯했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우연히 맛본 아삼 육원의 바삭한 껍질과 짭조름한 소스의 조화까지. 입안에 남은 미각의 기억들이 따뜻한 온천수와 섞여 마음속에서 몽글몽글하게 피어올랐다.
물에서 나와 다시 침대로 돌아왔을 때, 젖은 머리카락이 베갯잇에 닿아 서늘한 감촉을 남겼지만 이불 속은 더없이 포근했다. 내일 아침에 마실 오렌지 주스가 벌써부터 기다려졌다. 투숙객들의 찬사처럼 아주 달콤한 맛일 것이라 확신했다. 5월의 밤은 습했지만, 이 방 안에서만큼은 모든 것이 건조하고 깔끔했다. 나는 옆에 누운 상대의 손등을 가볍게 덮었다. 더 이상의 설명이나 약속은 필요 없었다. 그저 지금 이 순간, 이곳에 함께 있다는 것. 그것이 이번 여행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빗물이 창문에 그려놓은 길을 따라 시선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