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의 허기는 예고 없이 찾아온다
저녁 식사는 더할 나위 없이 근사했다. 진한 소스가 배어든 조개 링귀니는 씹을수록 바다의 풍미가 살아났고, 쫄깃한 도우의 마르게리따 피자는 입안 가득 고소함을 남겼다. 우리는 분명 배가 불러 더 이상은 아무것도 못 먹겠다고 장담했다. 하지만 12월의 타이베이는 묘한 구석이 있다. 문 밖을 나서는 순간 칼바람이 뺨을 매섭게 때리지만, 다시 실내로 들어오면 그 온기에 안심한 몸이 거짓말처럼 허기를 불러일으킨다.
`만다린 오리엔탈 타이베이`의 로비에 들어서자 은은한 샌들우드 향과 함께 포근한 공기가 우리를 감싸 안았다. 마치 두꺼운 캐시미어 담요를 덮은 듯한 안락함이었다. 객실로 돌아와 짐을 풀고 나니, 약속이라도 한 듯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그때 누군가 먼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우리 아까 배부르다고 한 거, 다 거짓말이었지?" 그 말 한마디에 팽팽했던 자존심의 끈이 끊어졌다. 우리는 누가 먼저 배고픔을 인정하는지 내기를 했고, 결과는 뻔했다. 내가 졌다. 패배의 대가는 편의점에서 털어온 정체불명의 간식들과 늦은 시간 주문한 룸서비스였다. 화려한 정찬 뒤에 찾아온 이 소박한 허기가 이번 여행에서 가장 정직한 순간처럼 느껴졌다.
눅눅한 종이봉투가 전하는 진심
"너 아까 분명히 배 터질 것 같다고, 숨도 못 쉬겠다고 했잖아."
친구가 낄낄거리며 닭강정 하나를 입에 넣었다. 나는 대답 대신 얼음이 짤랑거리는 콜라를 들이켰다. 우리는 호텔의 고급스러운 카펫 위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발목이 살짝 잠길 정도로 두껍고 부드러운 카펫의 촉감이 피부에 닿았다. 이 방의 모든 것은 과하게 친절했다. 조명은 은은한 호박색으로 빛났고, 공기는 쾌적했다.
"근데 아까 먹은 와규 말이야. 솔직히 맛은 있었는데, 분위기에 취한 느낌 아니었어?"
"맞아. 근데 서비스는 진짜 완벽하더라. 직원분들의 그 짙은 남색 제복만큼이나 태도가 정중해서 왠지 나까지 꼿꼿하게 앉아 있어야 할 것 같았어."
우리는 룸서비스의 정갈한 접시와 편의점의 눅눅한 종이봉투가 뒤섞인 테이블을 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5성급 호텔의 정교한 인테리어 속에 툭 떨어진 이질적인 비닐봉지. 하지만 이 부조화가 오히려 우리를 편하게 만들었다. 마치 완벽하게 재단된 정장을 입고 있다가 단추를 하나둘 풀어헤친 기분이었다.
"우리가 이런 곳에 어울리긴 하냐?"
"몰라, 일단 먹고 보자. 이 침대 진짜 넓다. 여기서 그냥 굴러다녀도 되겠어."
우리는 서로의 엉망인 모습에 대해 익살스럽게 투덜거리며 낄낄거렸다. 격식을 차린 식당에서는 차마 꺼내지 못했던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내년의 막연한 계획, 말도 안 되는 농담, 그리고 아주 사소한 불평들. 정교하게 세팅된 식기보다, 손으로 집어 먹는 튀김 조각 하나가 우리 사이의 거리를 더 좁혀주고 있었다. 과장된 감동은 없었다. 그저 같이 먹고, 같이 웃는 것. 그거면 충분했다.
포만감이 남긴 고요한 여백
봉투는 비었고, 뜨거웠던 대화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창밖으로는 12월의 타이베이 바람이 유리창을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 기온은 18도 정도. 춥지도 덥지도 않은, 딱 적당히 실내의 온기를 갈구하게 만드는 날씨였다. 방 안의 조명을 낮추자 가구들이 길게 그림자를 늘어뜨렸고, 공간은 이내 깊은 정적에 잠겼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천장을 보거나 스마트폰을 만졌다. 억지로 대화를 이어갈 필요가 없는 관계라는 것이 새삼 안심이 되었다. 잘 정돈된 시트의 바스락거리는 촉감이 피부에 닿았다. 빳빳하면서도 부드러운 그 감각이 오늘 하루의 피로를 적당히 눌러주었다. `만다린 오리엔탈 타이베이`의 우아한 레스토랑에서 느꼈던 긴장감은 사라지고, 이제는 오직 우리만의 편안한 리듬만이 남았다.
무용한 시간의 가치를 믿는다. 계획에 없던 야식을 먹고, 의미 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 그것이 여행의 진짜 얼굴일지도 모른다. 밖은 여전히 쌀쌀하겠지만, 이 두꺼운 벽과 포근한 침구 속에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나쁘지 않은 밤이었다. 아니, 꽤 좋았다.
침대는 넓었고, 잠은 깊었다.
- 편의점에서 파는 대만식 밀크티와 짭조름한 튀김 조합을 추천한다.
- 밤늦게 둔화북로 주변을 가볍게 산책하며 겨울 공기를 마셔보는 것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