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2시, 공기는 젖어 있었고 시트는 바스락거렸다
타이베이의 5월은 정직하게 눅눅했다. 호텔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도시 전체가 커다란 젖은 수건처럼 몸에 무겁게 감겨왔다. 습도 80퍼센트. 피부 위로 끈적이는 공기가 닿을 때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간격을 조금 더 좁혔다. 작은 우산 속에서 어깨가 부딪혔지만 딱히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좁고 밀폐된 공간이 주는 묘한 안도감이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의 체온이 섞이는 경계선 위에서 조용히 발을 맞췄다.
만다린 오리엔탈 타이베이의 로비로 들어서자마자 공기의 밀도가 마법처럼 바뀌었다. 밖의 눅눅함은 순식간에 증발하고, 정돈된 화이트 티 향과 은은한 나무 내음이 섞인 서늘한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우리가 묵은 디럭스 룸의 침대는 눈이 시릴 정도로 하얬다. 그 위에 몸을 던졌을 때 느껴지는 바스락거리는 시트의 감촉. 빳빳하게 다려진 고밀도 면의 질감이 피부에 닿는 순간, 옷가지에 묻어온 도시의 습기마저 모두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천장을 봤다. 누군가 '힘내자'거나 '특별한 시간을 보내자'고 억지로 분위기를 띄우지 않아도 충분했다. 그냥 같이 누워 있다는 것, 서로의 숨소리가 들리는 거리에서 정적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의 목적은 달성된 것 같았다. 그러다 작은 과자 봉지 하나를 같이 뜯으려다 둘 다 실패해서 봉투가 보기 좋게 찢어졌을 때, 우리는 동시에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대단한 이벤트는 아니었지만, 그 순간의 공기는 솜사탕처럼 가벼웠다.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고,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들은 서로의 몸을 합치며 느리게 아래로 길을 만들고 있었다. 그 무용한 속도를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이 길었다. 생산성 없는 시간이었지만, 그래서 더없이 완벽했다.
밤 11시, 백합 향기와 쫄깃한 생선 살의 기억
호텔 내 우아한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로 마주한 석반어는 생각보다 더 탄력이 있었다. 젓가락으로 살짝 눌렀을 때 밀려났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그 쫄깃한 저항감. 랍스터의 육질은 단단했고, 씹을 때마다 입안 가득 퍼지는 바다의 농도가 진하고 깊었다. 우리는 화려한 요리들 앞에서 정작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식기 부딪히는 달그락 소리만 냈다. 하지만 그 침묵은 어색함이 아니라, 서로의 씹는 속도와 호흡을 맞추어가는 다정한 조율 과정처럼 느껴졌다.
방으로 돌아오니 은은한 백합 향기가 공기 중에 낮게 머물러 있었다. 5월의 꽃향기는 너무 강렬하지 않아 오히려 마음을 차분하게 고요해지혀 주었다. 조명을 낮춘 방 안은 따스한 호박색 빛으로 물들었고, 우리는 침대 헤드에 나란히 기대어 앉았다. 밖은 여전히 습하고 어두운 도시의 소음이 가득했지만, 만다린 오리엔탈 타이베이의 방 안은 정확히 우리가 원하던 온도로 유지되고 있었다. 마치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우리만의 작은 코쿤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문득 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음에는 반딧불이를 보러 갈까?" 나는 대답 대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갈지 안 갈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네가 가고 싶다고 말할 때 반짝이는 그 눈빛과 표정이 좋았을 뿐이다. 우리는 서로의 손가락 끝을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리며 각자의 리듬으로 호흡했다. 완벽하게 맞물리는 톱니바퀴 같은 관계는 아니더라도, 조금씩 삐걱거리며 서로의 모서리를 깎아 맞춰가는 이 과정이 꽤 다정하게 느껴졌다.
특별한 약속이나 거창한 고백은 없었다. 다만 눅눅한 도시의 소음이 완벽히 차단된 이 정적 속에서, 우리는 서로가 여기 존재한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확인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더 바랄 것이 없는 밤이었다. 내일은 또 비가 올지도 모르지만, 이 쾌적한 방과 적당한 온도, 그리고 내 곁에 있는 너만 있다면 그것으로 괜찮을 것 같았다. 다시 이곳에 온다면, 그때도 우리는 아마 비슷하게 침묵하고 비슷하게 웃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사랑을 확인하는 가장 우리다운 방식이니까.
창밖의 빗소리가 자장가처럼 낮게 깔리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