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럼 세탁기. 일식 더블룸의 작은 발코니, 가장 구석진 곳에 웅크리고 있는 하얀 기계다. 손끝에 닿는 알루미늄 프레임은 서늘한 금속성을 띠지만, 그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회전하는 물의 온도는 미지근하고 다정하다. 젖은 수건의 눅눅한 물비린내와 무색무취의 세제 향이 섞여 습한 공기 중에 얇은 막처럼 퍼진다. 탈수 단계에 접어들면 기계는 낮은 저음으로 웅웅거리며 바닥을 통해 미세한 떨림을 전달한다. 그 진동은 발바닥을 타고 올라와 무릎 언저리에서 멈추고, 갓 건조된 옷가지에서 피어오르는 뭉근한 열기가 코끝을 스치며 안도감을 준다.
멈춰 서서 나누는 말들
"이제 나갈까?"
그가 발코니 문턱에 비스듬히 기대어 물었다. 나는 쉼 없이 돌아가는 세탁기 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규칙적인 회전이 주는 묘한 최면 속에 잠겨 있었다.
"글쎄. 저거 다 돌아갈 때까지 조금만 더 있자."
"밖은 더운데?"
"그냥, 이 소리가 좋아서. 마음이 차분해지는 기분이야."
그는 잠시 침묵했다. 내 대답이 의외였는지, 아니면 그가 듣는 소리 또한 나와 같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천천히 내 옆으로 다가와 나란히 섰다. 얇은 여름 옷감 너머로 어깨가 살짝 맞닿았다. 누구 하나 먼저 떼어내지 않았다.
"그럼 딱 십 분만 더 있자. 그러고 나서 야시장 가고."
우리는 그렇게 약속했다. 거창한 계획은 없었다. 다만 세탁기가 멈추는 시간이 우리의 다음 행선지를 결정하는 유일한 이정표가 되었다.
무용한 시간이 주는 안도감
낯선 여행지에서 빨래를 한다는 건 사실 꽤 무용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 무용함이 주는 평온함이 좋았다. Le Wei Xing Lv the way inn.의 일식 룸은 은은한 나무 냄새가 났다. 바닥의 결은 고르고 매끄러웠으며, 조명은 낮게 깔려 방 안의 공기를 차분하게 고요해지혔다. 셀프 체크인 기기로 빠르게 입실하며 느꼈던 그 효율적인 건조함과 디지털의 서늘함은, 방 안의 따뜻한 나무 질감과 자동 비데의 세심한 편안함을 만나면서 조금씩 말랑하게 녹아내렸다. 43인치 텔레비전의 전원을 끄자, 방 안에는 다시 세탁기의 낮은 진동음만이 남았다. 그 소리는 마치 이 공간이 우리에게 건네는 낮은 숨소리처럼 들렸다.
방을 나서면 1분 거리의 충효 야시장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9월의 타이중 공기는 낮에는 숨이 막힐 듯 덥지만, 해가 지면 묘하게 청명하고 서늘해진다. 거리에는 기름진 음식 냄새와 사람들의 웅성거림, 상인들의 외침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우리는 아치 삼대 복주 의면 집으로 향했다. 쫄깃한 면발 위에 짭조름한 고기 고명이 얹어진 의면 한 그릇. 입안에서 맴도는 묵직하고 진한 육수의 맛이 허기를 달래주었다. 화려한 미식은 아니었지만, 그 소박한 온기가 충분했다.
다음 날에는 추홍곡 생태공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심 속에 움푹 파인 하향식 녹지. 아래로 내려갈수록 도시의 소음은 아득히 멀어지고, 초록색의 밀도는 더욱 짙어졌다. 유리 전망대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문득 서로의 보폭이 조금씩 비슷해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처음에는 내가 앞서갔고, 그다음에는 그가 서둘러 나를 따라잡았다. 하지만 이곳의 완만한 산책로를 걷는 동안 우리는 자연스럽게 같은 속도로 움직였다. 세탁기의 일정한 회전처럼, 우리의 리듬도 어느덧 하나의 궤적을 그리며 맞물려 있었다.
호텔로 돌아오자 발코니에 널어둔 옷들이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9월의 바람은 적당히 건조했고, 옷감은 보송하게 말라 있었다. 거창한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그냥 이곳에 머물렀고, 빨래를 했고, 함께 걸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여행이었다. 낯선 도시의 작은 방에서 우리는 서로의 리듬을 확인했고, 그 진동이 결코 나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Le Wei Xing Lv the way inn.에서의 시간은 그렇게 단순한 휴식을 넘어, 서로의 속도를 맞추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었다.
발코니에 걸린 하얀 수건들이 기분 좋게 흔들리고 있었다.
- 충효 야시장의 복주 의면은 김이 모락모락 날 때 천천히 드시길 권합니다.
- 추홍곡 생태공원은 해 질 녘의 빛이 가장 아름다우니 늦은 오후에 방문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