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표는 그냥 예쁜 쓰레기였던 걸로"
"야, 너 아까 80군데 다 훑는다고 호언장담 안 했냐?" 민석이 땀에 젖어 눅눅해진 티셔츠 차림으로 침대에 대자로 뻗으며 낄낄거렸다. 툭, 하고 바닥에 떨어진 가방에서 쏟아진 잡동사니들이 방 안의 정적을 깼다. 나는 천장의 은은한 조명을 멍하니 바라보며 대답했다. "했지. 근데 내 의지는 충만했으나 육신이 거부하네." 옆에서 짐을 풀던 지혜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도착해서 한 일이라고는 체크인하고 눕기뿐이잖아. 우리 진짜 답 없다." "답 없는 게 아니라 효율적인 거야. 최소한의 동선으로 최대의 휴식을 취하는 거지." 우리는 서로의 한심함을 확인하며 동시에 안도했다. 구겨진 계획표가 발치에 툭 떨어졌고,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소란스러운 웃음 뒤에 숨은 안온한 품
우리가 머문 Gao Xiong Fu Hua Da Fan Dian의 객실은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고풍스러움과 정갈함이 묘하게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빳빳하게 다려진 면 시트의 바스락거리는 촉감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낮 동안의 소란함은 어느새 잦아들고 여행자의 긴장이 기분 좋게 풀려나갔다. 1월의 가오슝은 덥지도 춥지도 않은, 딱 적당한 온도의 공기를 머금고 있었다. 창문을 살짝 열자 도시의 소음이 옅은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두꺼운 암막 커튼을 치는 순간 방 안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정적의 섬이 되었다.
엠알티 아름다운 섬역에서 내려 호텔까지 걷는 길은 적당한 습도와 상점들의 활기가 섞여 쾌적했다. 로비에 들어섰을 때 코끝을 스치던 은은한 우디 향과 높은 천장의 개방감은 마치 오래된 친구의 집으로 초대받은 듯한 편안함을 주었다. 특히 야외 수영장에서 바라본 도심의 풍경은 Gao Xiong Fu Hua Da Fan Dian의 백미였다. 체온과 비슷하게 맞춰진 미온수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겨울 햇살이 수면에 부서지며 금빛 가루처럼 흩날렸다. 물결이 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감각에 취해 한동안 나갈 생각을 잊었다.
아침 식사로 제공된 풍성한 요리들은 갓 구운 빵의 고소한 향기와 따뜻한 국물의 온기로 우리의 위장을 다독였다. 접시 가득 담긴 음식들을 앞에 두고 서로의 식욕을 비웃으며 나누던 대화들. 무용한 시간 같지만, 사실 이런 틈새의 시간이 여행의 진짜 목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푹신한 카펫 위를 걸을 때마다 발끝으로 전해지는 몽글몽글한 감각은 이곳이 가진 노련한 친절함을 닮아 있었다.
낮은 조명 아래 겹쳐지는 진심들
"근데 여기, 생각보다 훨씬 아늑하다." 밤 11시, 오렌지빛 스탠드 조명만 켜진 방에서 지혜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방 안에는 낮의 소란함 대신 차분한 공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읽고 있던 책의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냥 이대로 시간이 멈춰도 좋을 것 같아." "내일은 진짜 아무것도 하지 말자. 늦잠 자고, 배고프면 슬슬 야시장이나 가고." "찬성. 원래 여행은 계획이 어긋날 때 비로소 시작되는 거니까." 우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서늘한 에어컨 바람과 낮은 숨소리, 그리고 서로를 믿는 마음만으로도 방 안은 이미 꽉 차 있었다. 낮에는 서로를 깎아내리며 웃었지만, 밤의 정적 속에서 나누는 말들은 더없이 다정하고 진실했다.
창밖으로 가오슝의 야경이 보석처럼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 풍성한 조식의 따뜻한 국물 요리로 느긋한 아침의 온기를 채울 것.
- 야외 수영장에서 가오슝의 겨울 햇살을 온몸으로 맞으며 멍하니 쉴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