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채색의 방에 내려앉은 작은 태양
오렌지색 베개. 빳빳하게 다려진 순백의 시트 위에 툭 놓인, 채도 높은 오렌지빛의 작은 조각. 손가락으로 깊게 눌렀을 때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되살아오는 적당한 탄성. 10월의 나른한 오후 햇살이 얇은 흰 커튼을 통과해 방 안으로 길게 스며들면, 그 베개는 마치 방 한구석에 내려앉은 작은 태양처럼 빛났다. 화려한 장식은 없지만, 무채색의 정갈한 공간에서 유일하게 말을 거는 선명한 색깔. 그 위에 턱을 괴고 누우면 면직물의 서늘한 감촉과 오렌지색이 주는 시각적인 온기가 묘하게 섞여 들어와 마음을 진정시켰다.
귤빛 조각을 사이에 둔 대화
"이 베개, 꼭 잘 익은 귤 같지 않아?"
그가 베개 끝을 손끝으로 살짝 만지며 말했다. 나는 옆으로 누운 채, 빛을 받아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네. 뜬금없는 색인데, 이상하게 나쁘지 않아."
"우리가 여기 온 게 조금 뜬금없었던 것처럼."
그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창밖으로 시먼딩의 소란스러운 소음이 아스라이 들려왔지만, 방 안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그냥 이렇게 누워만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아."
"응, 그걸로 충분해."
기억의 갈피에 남은 오렌지색 리듬
체크아웃을 하고 난 뒤에도 그 오렌지색 베개는 한동안 기억의 잔상으로 남았다. Jie Si Lv Tai Bei Xi Men Guan에 머문 시간은 사실 어떤 거창한 사건의 연속은 아니었다. 시먼역 4번 출구에서 나와 3분 정도 걸었을 때 마주한 호텔의 입구, 그리고 좁지만 효율적으로 짜인 현대적인 객실의 수납공간 같은 것들. 여행자의 짐이 바닥에 굴러다니지 않게 배려한 그 정교한 설계가 오히려 우리 마음속에 예상치 못한 여유를 만들어주었다.
특히 5층 로비에서 24시간 내내 제공되던 커피의 향긋한 내음과 컵 속에서 달그락거리던 얼음 소리는 이 여행의 작은 의식과도 같았다. 짙은 에스프레소에 얼음을 가득 채워 마시며 우리는 비로소 도시의 속도에서 벗어났음을 느꼈다. 10월의 타이베이는 공기가 적당히 건조했고, 하늘은 마치 누군가 정성스럽게 보정한 것처럼 시리도록 파랬다. 얇은 가디건 하나만 걸치고 거리를 걸으면, 피부에 닿는 바람의 온도가 딱 좋았다.
우리는 '노 바운더리'라는 이름의 공유 공간에서 말없이 각자의 책을 읽기도 했고, '칼레이도스코프'의 몽환적인 핑크빛 공간 속에서 서로의 어색한 미소를 사진에 담기도 했다. 특별한 대화가 없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은 상태. 그것이 우리가 이번 여행에서 정말로 찾고 싶었던 진짜 리듬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침마다 방문한 '저스트 카페'의 조식은 소박했지만 정갈했다. 현지의 맛이 밴 따뜻한 음식들을 함께 나누며 우리는 오늘 어디를 갈지 고민하는 대신, 어제 얼마나 깊게 잠들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화려한 관광지보다 Jie Si Lv Tai Bei Xi Men Guan의 안락한 방 안이 더 좋았던 이유는, 아마도 그곳이 우리를 재촉하지 않는 유일한 성소였기 때문일 것이다.
객실에 마련된 세탁기 덕분에 땀에 젖은 옷가지들을 깨끗이 빨아 널어두고, 뽀송뽀송하게 마른 옷을 입고 다시 거리로 나설 때의 그 쾌적함. 그런 사소한 디테일들이 모여 여행의 질감을 바꾸어 놓았다. 거창한 사랑의 맹세나 극적인 고백은 없었지만, 함께 누워 있던 그 오렌지색 베개의 온기만으로도 우리는 서로에게 충분히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무용한 시간의 가치를 알게 된 여행이었다. 그냥 좋았으니까, 그것으로 충분한 시간들이었다.
오렌지색 베개 위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포개어 길게 늘어졌다.
- 시먼역 4번 출구에서 호텔까지 이어지는 3분의 짧은 산책을 즐겨보세요.
- 저스트 카페의 조식을 마친 뒤, 계획 없는 오전의 거리 탐색을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