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 햇살이 벽면에 직사각형의 자국을 남기던 시간
역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까지는 10분 남짓의 거리. 캐리어 바퀴가 보도블록의 틈새와 부딪히며 내는 규칙적인 소음이 정적을 깨웠다. 9월의 가오슝은 여전히 뜨거웠지만, 바람의 무게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피부에 끈적하게 달라붙는 습기보다는, 살결을 적당히 스치는 건조한 온기. 우리는 서로의 보폭을 억지로 맞추려 애쓰지 않았다. 그저 나란히 걷다 보니 현대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Jie Si Lv Gao Xiong Zhan Qian Guan 앞에 도착했다.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쾌적하고 서늘한 공기가 땀방울을 식혀주었다. 체크인을 하며 받은 카드키에는 작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예술 작품이라는 설명이 덧붙어 있었지만, 우리는 그 심오한 의미를 묻지 않았다. 그저 색감이 예쁘다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객실로 향하는 복도는 짙은 갈색의 나무 톤으로 정돈되어 있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무가 소리를 흡수하는 기분이 들었고, 소란스러운 도시의 소음은 복도 끝에서부터 서서히 지워졌다.
방 문을 열자 생각보다 넓고 쾌적한 공간이 펼쳐졌다. 짐을 풀기도 전에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빳빳하게 잘 마른 하얀 시트의 서늘한 감촉이 피부에 닿는 순간, 비로소 여행의 긴장이 풀렸다. 창밖으로 가오슝의 풍경이 보였지만, 누구도 커튼을 젖혀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그저 누워 천장의 무늬를 세거나, 서로의 고른 숨소리를 듣는 일. '이토록 무용한 시간이 필요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용함이 주는 안도감이 너무나 달콤했다. '힘내자'거나 '행복하다'는 말은 굳이 필요 없었다. 그냥 지금 여기, 이 넓은 침대라는 하얀 침묵의 들판 위에 함께 누워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관계가 된다는 것은, 아마도 이런 작은 정적을 온전히 공유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오후 11시, 야시장의 소란이 잦아든 뒤의 고요
리우허 야시장은 온갖 냄새의 집합소였다.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피어오르는 구운 해산물의 향, 달콤한 열대 과일의 내음,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이국적인 향신료의 냄새가 뒤섞여 공중에 떠다녔다. 우리는 인파 속에 섞여 천천히 걸었다. 가끔 타인의 어깨가 부딪혔지만 불쾌하지 않았다. 계획 없는 걸음 끝에 눈에 보이는 음식을 사고, 길가에 서서 나누어 먹었다. 짭조름한 맛과 달콤한 맛이 입안에서 교차했다. 특별한 미식의 경험은 아니었을지 모르나, 그 순간의 온도와 습도, 그리고 옆에 있는 사람의 온기가 맛을 완성했다.
다시 Jie Si Lv Gao Xiong Zhan Qian Guan으로 돌아오는 길은 짧았다. 야시장의 화려한 네온사인과 소음이 멀어지고, 호텔의 정적이 다시 시작되는 그 경계선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로비를 지나갈 때 은은하게 풍겨오는 조식 뷔페의 정갈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내일 아침에는 저곳에서 가벼운 식사를 하며 하루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방으로 돌아와 조명을 낮췄다. 낮에 보았던 그 넓은 공간이 이제는 우리를 포근하게 감싸는 요람처럼 느껴졌다. 에어컨의 낮은 기계음이 백색소음처럼 방 안을 채웠다. 우리는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몸을 담갔다. 뜨거운 물속에서 하루의 피로가 녹아내리는 동안, 우리는 오늘 먹은 음식들과 스쳐 지나간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떤 것이 더 맛있었는지, 어떤 표정이 기억에 남는지. 과장 없이, 담담하게. 여행은 대단한 발견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사소한 기억의 조각들을 함께 쌓아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뒤 피부에 닿는 공기가 유난히 쾌적했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나는 은은한 샴푸 향과 방 안의 정적이 잘 어울렸다. 우리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낮보다 더 깊은 안락함이 찾아왔다. 내일은 어디를 갈지,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눈을 떴을 때 보이는 풍경이 다정하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가오슝의 9월 밤은 생각보다 따뜻했고, 이 공간은 우리가 머물기에 충분히 안온했다. 다시 이곳에 와도 좋겠다고, 아주 짧게 생각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천천히 걸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