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먼저 배고프다고 했더라
방 안에는 망막을 찌르는 눈부신 조명이 없었다. 대신 구석구석 숨겨진 간접 조명이 벽면을 타고 부드러운 비단처럼 흘러내렸다. 아르데코 스타일 특유의 기하학적인 선들이 10월 가오슝의 낮은 채도와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이맘때의 공기는 본래 습하지만, 피부에 닿는 바람이 끈적이지 않고 적당히 보송해 걷기에 더없이 좋았다. 가오슝 시립 도서관과 전시 센터 근처를 정처 없이 거닐다 보니, 어느새 보랏빛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발걸음을 멈췄다. 누군가 나지막이 배가 고프다고 속삭였다. 정확히 누구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말 한마디에 우리는 다시 인터컨티넨탈 가오슝의 로비를 지나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성광원도의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며 도시의 밤을 깨우고 있었고, 비닐봉지에 담긴 현지 간식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서늘한 밤공기를 경쾌하게 채웠다.
입안에서 맴도는 시시콜콜한 말들
"너네 이거 봐, 조명 진짜 미쳤지 않냐? 눈이 하나도 안 아파.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기분이야."
침대 끝에 걸터앉아 편의점 음식들을 늘어놓으며 친구가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나무젓가락을 쪼개며 덧붙였다.
"조명도 좋은데 침대가 진짜 대박이야. 여기 눕는 순간 그냥 기절각이라고. 시트 촉감이 너무 부드러워서 피부에 착 감겨."
"야, 근데 너 아까 충전기 안 가져왔다며? 진짜 뻔뻔하다. 결국 내 거 같이 쓰게 생겼네. 여행 와서 그것도 잊어버리냐?"
"그럴 수도 있지. 여행의 묘미는 이런 예상치 못한 빈틈에 있는 거야. 그보다 이 돼지피 수프 좀 먹어봐. 국물이 진짜 진하고 짭조름해."
우리는 좁은 테이블 위에 흩어진 음식들을 나누어 먹으며 서로를 티격태격 헐뜯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이번 여행의 계획이 너무 없었다고 투덜댔고, 누군가는 그래서 더 자유로웠다고 맞받아쳤다. 인터컨티넨탈 가오슝이 내세우는 스마트 럭셔리라는 수식어는 우리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전동 커튼이 스르르 닫히며 외부의 소음을 차단해 주는 이 안락한 공간에서, 말도 안 되는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이번 여행에서 한 거라곤 걷고, 먹고, 여기 누워있는 것뿐이네."
"그게 진짜 여행이지. 넌 너무 효율만 따져. 그냥 이 순간의 공기와 냄새가 좋다고 하면 되잖아."
우리는 서로의 엉뚱함을 비웃으며 낄낄거렸다. 화려한 아르데코풍의 인테리어와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야식이라는 이 기묘한 부조화가 오히려 우리를 더 편안하게 만들었다.
포만감 뒤에 찾아온 정적
음식들이 사라지고, 왁자지껄했던 대화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방 안에는 낮은 조명과 함께 기분 좋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각자 창가로 다가갔다. 높은 층에서 내려다본 가오슝의 야경은 적당히 번잡하고 적당히 고요했다. 항구 쪽에서 불어오는 눅눅하면서도 시원한 바람이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욕실에서 풍겨오는 은은한 어메니티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고, 푹신한 침구 속으로 몸을 깊숙이 밀어 넣자 온몸의 긴장이 한꺼번에 풀리며 기분 좋게 무거워졌다. 무언가 대단한 깨달음을 얻으려 애쓸 필요는 없었다. 그저 10월의 가오슝, 완벽한 호텔, 그리고 함께 웃을 수 있는 친구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 그것으로 이번 여행의 목적은 이미 달성된 셈이었다. 굳이 힘내라는 말이나 특별한 의미를 찾지 않아도 좋았다. 그저 이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사치였다.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의 불빛을 이불 삼아, 우리는 깊은 잠 속으로 천천히 고요히 머무했다.
- 편의점에서 고른 진한 돼지피 수프와 달콤한 펑리수의 단짠 조합
- 고요한 밤, 호텔 라운지에서 즐기는 따뜻한 우롱차 한 잔의 여유